심병건: Pressed Drawing


DATE : 2022.11.01~ 2022.12.05

ARTIST: 심병건




주름 속에 깃든 멈추지 않는 생명력


-심병건의 스틸 조각


서길헌(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수많은 산과 골을 품고 있는 주름진 지형이 특징인 한반도는 모든 골짜기마다 그만큼의 풍부한 사연과 내밀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조각가 심병건의 작업실이 자리하고 있는 충북 진천은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는 말로 유명한 내륙의 평온한 풍광을 자랑한다. 그의 작업실 주변에는 비교적 높지는 않지만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비옥한 평야 위에 여기저기 솟아있고 강과 호수들이 펼쳐져 있어서 한반도의 굴곡진 지형의 축소판과도 같다. 작가 심병건은 철판으로 구현해내는 자신의 주름 작업을 통해 우리 민족이 걸어왔던 굴곡진 삶의 구김과 주름을 조형언어로 뿌리내리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살면서 얻은 마음의 상처나 깊은 슬픔 등의 풀리지 않은 삶의 응어리들은 감정의 잔여물로 마음속에 서려 있다. 한국인들은 역사의 수많은 질곡 속에서도 삶의 숙명적인 아픔을 가슴에 껴안은 채 끈질기게 삶을 영위해 왔다. 한이라고도 부르는 한민족 특유의 정서적 바탕을 이루는 이 감정은 묵묵히 살아가는 가운데에서도 역동적인 삶의 에너지로 솟구쳐올라 한국인들의 삶에 강한 내적 동기가 되어주었다. 이러한 감정의 응어리들은 뇌의 주름처럼 접혀있는 작가의 스테인리스 스틸의 요철에 서려 있는 음영의 무늬와도 유사하다. 구겨진 철판 위에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숱한 이미지를 되쏘아내는 그의 작품들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끈질긴 힘의 원천인 정서의 굴곡을 은연중에 담아낸다. 형태 없는 감정의 리듬이 생명력을 품고 골을 이루며 스며 있는 것, 그것이 심병건이 추구하는 조각의 요체라고 말할 수 있다. 


평평한 스틸의 표면이 프레스의 압력을 받아들여 긴장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생겨나는 주름은 평면에서는 담지 못하는 많은 것을 담아낸다. 물리적으로 올록볼록한 공간은 그 자체로 복합적인 볼륨의 무수한 공간을 구성한다. 수많은 비정형의 입체 공간을 구성하는 주름은 다양한 공간을 중첩하여 포괄함으로써 그 자체로 다층적인 풍경을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공간은 안과 밖으로 수많은 표정을 아우르며 각각 거기에 부합하는 섬세한 정서를 반영한다. 인간의 복잡한 정서를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같은 감정이라도 그 색깔과 강도는 모두 다르다. 심병건이 스틸의 평판 위에 프레스의 힘을 빌려 변형시키는 구겨짐이 음영을 이루며 물결의 흐름 같이 미끄러지듯 만들어내는 표면의 광택은 사람의 섬세한 정서의 흐름을 왜상(歪像) 거울처럼 비추어낸다. 삶 속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상황에 따라 파생되는 사람의 감정은 때로는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시간과 함께 응어리지고 옹이처럼 맺혀지며 더러 물 흐르듯 유연한 정서의 리듬으로 변하여 가슴 속에 남아 마음의 표정을 이룬다. 그것은 때로는 어떤 계기와 만나 환하게 빛나는 인생의 환희로 변하기도 하고 폭포와 같은 슬픔으로 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의 흐름은 거기에 알맞은 고저와 강약의 리듬을 가지는 음악의 멜로디와 같다. 심병건의 작업에서 구김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주름의 무늬는 물결과 같이 솟구치고 소용돌이를 일으키기도 하는 감정의 이러한 흐름을 속속들이 비춰내는 마음의 반사경을 떠오르게 한다.


들뢰즈(Deleuze)에 의하면 주름작용은 하나의 기억이다. 이 말은 주름이 그렇게 형성되기까지의 많은 과정과 사연을 스스로 간직하고 기록하고 있는 기억의 저장소라는 말과 같다. 그러기에 심병건이 말한 한민족의 굴곡진 삶의 구김과 주름이라는 정서는 그가 스테인리스 스틸 작업을 위해 손에 잡은 레버를 따라 움직이는 묵직한 프레스기의 압력에 의해 구겨지기 시작하는 스틸의 굴곡에 내재하는 주름의 골마다 담겨있는 진폭의 기억과 유사하다. 이는 작가의 순수한 의지와 상념이 팔의 신경을 따라 프레스의 드로잉으로 전이되어 나타나는 것이기에 예술가의 의지와 상상력이 프레스의 압력으로 화하여 굴곡진 스틸의 주름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표면에 끊임없이 변화하며 나타나는 광택과 반사의 효과는 보는 이의 감정들을 거울처럼 유연하게 비춰주면서도 그것을 끊임없이 흔들어 일그러지게 하며 어느 한순간도 고정된 형상으로 고착되지 않으면서 미지의 이미지로 비춰낸다. 우리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굳이 정의할 필요도 없이 그것의 리듬이 환기하는 오묘한 감정의 지형도와 그것이 불러내는 전체적인 생명의 느낌과 마주한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정지된 표면에 주변 환경을 끌어들여 일상적인 세계의 풍경을 움직이는 것으로 변화시킨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성급하게 정의되지 않는 수많은 강도의 멈추지 않는 이미지로 생성되는 풍경을 반사해내는 동시에, 한국인의 생명력의 원천이기도 한 끈질긴 내적 정서의 흐름을 굴곡진 주름의 조형언어로 다채롭게 반영해내고 있다.